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이코 공주 (문단 편집) === 황권 다툼 === [[1980년대]]가 끝나고 [[1990년]]이 되면서 [[일본 황실]]에서는 황위를 두고 상상을 초월하는 암투극이 벌어지고 있었다. [[나루히토]]가 [[마사코 황후|오와다 마사코]]와 혼인하기 3년 전, [[후미히토]]는 [[가와시마 키코]]와 혼인해서 장녀 [[마코 공주]]를 낳고 황태자의 결혼부터 1년 뒤 차녀 [[카코 공주]]를 낳았다. 그렇게 먼저 황손을 낳으면서 황실과 국민들의 신뢰를 얻으면서, 그리고 [[궁내청]]은 매우 오래 전부터 황태자와 사이가 나빴기 때문에 우익과 손잡고 후미히토를 후계자로 밀어주고 있었다. 하지만 동궁 파벌이었던 [[다카마도노미야 노리히토]](아키히토의 [[사촌]]동생, 즉 나루히토 형제의 [[당숙]]) 내외가 "황태자비가 아이를 가지기도 전에 둘째 아이까지 낳다니, 황실의 서열을 알고 행동하시오."라고 일침을 가했고, 천황 쪽에서도 일개 왕자가 황태자보다 눈에 띄면 안 된다고 생각했는지 동궁에서 아이가 생기기 전까지 아키시노노미야 궁저는 아이를 가질 수 없었다. 2001년 초에 [[마사코 황후|마사코 황태자비]]가 [[임신]]을 했는데, 처음에는 성 감별을 요청했지만 아이의 몸에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에[* 성 감별은 [[수정란]]에서 세포를 추출해서 하는 것이다. 발생 중에 있는 수정란에서 세포를 추출하는 것이 수정란에 좋은 영향을 끼칠 리가 없다. 만약 세포 수가 8개인 발생 초기의 수정란에서 세포 하나를 떼낸다면 무려 13%의 손실이 된다. "[[히사히토]]에게 뭔가 문제가 있다"는 루머가 돌았던 이유도, 히사히토가 성 감별로 태어났다는 소문이 파다했기 때문이었다.] "하늘의 뜻에 맡기겠다."며 거부했다. 하지만 동년 12월에 태어난 아이는 딸인 아이코 공주였고, 이듬해 [[다카마도노미야 노리히토]] 친왕의 급작스런 사망으로 나루히토는 황실 내의 유일한 지지 세력을 잃게 된다. [[아키히토]] 천황과 [[미치코 상황후|미치코 황후]]는 아이코 공주의 탄생을 기뻐하면서도, "대를 이을 아들을 낳아야 한다"고 명령한다. 하지만 [[나루히토]]는 "아이코가 3살쯤 될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3년이 지난 후에도 몸도 정신도 엉망이 된 [[마사코 황후|마사코 황태자비]]가 둘째를 [[임신]]하지 못하자[* 이전에도 임신하긴 했지만, 아이코 공주를 빼고는 모두 [[유산(의학)|유산]]되었다.], 결국 아키히토 천황은 동궁이 아들을 낳게 하는 걸 포기하고 대신 차남 내외인 [[후미히토]]와 [[키코 비]]에게 아들을 낳으라고 명령한다. 차남 내외는 2006년에 늦둥이 아들 [[히사히토]]를 낳았는데, 형 내외를 꺾기 위해 인위적으로 아들을 임신해 낳았다는 의혹이 파다하다. 히사히토가 태어나자 아키시노노미야 궁저+궁내청+우익 세력은 그동안 조용히 준비하던 야심을 대외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고, 천황 자리를 빼앗기 위해 암약했다. 처음에는 황태자 자리를 빼앗으려고 했지만, 천황은 "첫째는 첫째고 둘째는 둘째", "네 마음대로 해라. 뭔 짓을 해도 너는 천황 못 된다."라는 식이라서 그쪽은 수포로 돌아가자, 천황이 죽은 뒤 여론공작을 빌미로 천황 자리를 빼앗으려고 했다. 하지만 감히 황태자를 직접 건드리기는 눈치가 있는지라, [[마사코 황후|마사코 황태자비]]와 아이코 공주에게 집중포화를 가했다. 하지만 [[아키히토]]가 황태자를 바꿀 의향이 없다는 것이 2004년에 인격부정발언으로 확인되자[* '[[마사코 황후|마사코 황태자비]]의 경력과 인격을 부정하는 움직임이 있던 것도 사실입니다.'라고 [[나루히토]]가 기자회견을 한 사건. 이때 [[아키히토]]는 황태자가 논란을 일으켰다고 질책했지만, 얼마 후 [[궁내청]] 장관의 말을 통해 '손녀가 보고 싶으니 부황을 찾아뵈어라'라고 말해서 관계 회복을 했다.] 황태자는 자신이 천황으로 즉위한 뒤의 입지 안정를 꾀하는 방향으로 눈을 돌린다. 궁내청은 즉위하고 나서 그동안 자기에게 했던 걸 이유로 숙청하면 그만이지만, 문제는 자신이 즉위한 뒤에도 남동생인 아키시노노미야 궁저는 유일한 남자아이인 [[히사히토]]를 쥐고 여전히 자신의 자리를 노리며 여러 가지 방면으로 흔들 게 분명했고, 당시 기준으로 [[후미히토]]의 큰딸 [[마코 공주]]와 작은딸 [[카코 공주]]의 호감도가 상당히 높았기에 섣불리 후미히토 일가를 건들 경우 역풍이 불 수도 있었기에 천천히 이들의 권한을 빼버릴 생각을 했을 것이다. [[나루히토]]의 지위를 반석으로 다지고 종사를 황족으로서의 자각이나 각오 따위는 없이 자기 하고 싶은 데로 황족이라는 지위를 악용하는 차남 아키시노노미야 집안에다 넘기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의 외동딸 아이코 공주를 반드시 자신의 후계자로 삼아야 했다. 하지만 아이코 공주는 여자이기 때문에 그녀가 천황에 즉위할 경우 문제가 생긴다. 아이코 공주의 진짜 문제는 "아이코 공주의 후사를 누구로 하냐?" 또한 "일반인 남성과 결혼한 아이코 공주의 자녀가 과연 천황 승계권이 있는가?"이다. 일본에서는 "황위를 부계로 계승한다"는 원칙이 있는데, 만약 아이코 공주가 황족 출신이 아닌 남성과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그 아이를 후계자로 삼는다면 상술한 원칙이 깨지기 때문이다. 만약에 차남인 [[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가 야망을 드러내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나루히토에게 고개를 숙였으면, 조금 꺼림칙하긴 해도 사촌인 [[히사히토]]와 혼인시키는 것을 고려했을 수도 있지만, 그것마져도 후미히토가 제 발로 걷어차버렸다. 히사히토가 미야케 창설이 가능하다고 굳이 형의 유일한 자녀와 결혼하는 걸 고려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던 모양인지, 어차피 아이코 공주에게 천황 자리는 못 간다고 생각했는지는 모를 일이다. 아무튼 지금 상황에서 자신의 친딸인 아이코 공주의 직계로 이어나가지 못하면 결국 히사히토나 히사히토의 가문에다 물려줘야 하는데, 그걸 막는 것이 [[나루히토]]의 목적이었다. [[나루히토]] 황태자는 아이코 공주를 보호하기 위하여 자신의 후계자로 삼으려 했고, [[마사코 황후|마사코 황태자비]]도 딸의 미래를 위해서 이에 동참했다. 우선 사촌남동생 [[히사히토]]를 제치기 위해서는 "히사히토보다 아이코 공주가 낫다"라는 인식을 만들어서 항간에 인식시킬 필요가 있었다. 거기다 우익이 주간지들을 통해 아이코 공주에 대해서 [[자폐증]]이니 적응장애니 뭐다 하면서 황족으로서의 자격이 없다는 식의 여론전을 벌이고 있었던 만큼 더더욱 아이코 공주의 우수함에 대한 압박이 컸다. 하지만 황태자 부부는 모두 매우 우수한 사람들이었던 만큼 딸의 교육에는 자신이 있었을 것이고, 당시 마사코 황태자비가 건강 문제로 동궁 칩거를 이어나간 게 오히려 아이코 공주의 교육에 시간을 쏟을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교육은 성과를 보여서, 아이코 공주는 [[가쿠슈인]] 초등과 고학년이 되었을 무렵부터 일본 상위 1% 정도에 해당되는 편차치 72점이라는 상당히 우수한 성적을 냈고, 이러한 성적을 공개한 이후부터 주기적으로 주간지에다 "아이코 공주 [[도쿄대학]] 진학 설"을 흘려버리면서 그동안 주간지 중심으로 퍼지던 아이코 공주의 자폐설 등을 일축시키면서도 동시에 학력에 있어서 여러 가지로 문제가 많은 아키시노노미야 일족, 특히 [[키코 비]]를 상당히 초조하게 만들었다. 아키시노노미야 가문은 오래 전부터 안 좋은 소문이 많았고, 그 시절에도 "남자라는 이유로 직계보다 방계가 앞서도 되냐"는 말이 많았다. 그러자 나름대로 정치 감각이 뛰어난 [[키코 비]]는 최대한 [[마코 공주]]와 [[카코 공주]]의 공무를 독려해서 국민들의 환심을 사려고 노력하면서, 동시에 [[히사히토]]의 성적을 아이코 공주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하여 노력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일이 일어난 이유로는 마코 공주와 카코 공주의 대학 진학 논란이 있던 시기와 같은 시기였기 때문에 "히사히토가 천황 후계자로 제대로 된 인물인가?"라는 여론이 생기기 시작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키코 비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며 자신의 야심을 포기하지 않았다. 동궁에서 아이코 공주의 성적 이상으로 공을 들인 것은 인성교육이었다. [[히로히토]]의 적장손으로 태어나 장래 천황이 될 자로서 엄격하게 제왕학을 배우며 성장한 [[나루히토]]는 황족으로서의 고고함과 긍지가 매우 높았고, [[마사코 황후|마사코 황태자비]]도 인성에는 문제가 없었다.[* [[마사코 황후]]는 황태자비 시절부터 공무 중에 동선에 있는 사람 외에 그 뒤에 있는 사람들까지 신경 쓰고 다가갈 정도로 배려심이 깊다. 배려가 몸에 배었다는 [[나루히토]] 덴노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고. 마사코 황후는 [[외교관]]의 자녀로 태어나서 이후 아버지의 뒤를 이어 (매너와 에티켓이 중요한) 외교관으로 활동했으며, 외교관 활동 당시 [[외무성]] 내에서도 상당히 유능하다고 소문이 자자했다. (사실 입사 3년차 신입이 미일 간의 반도체 관련 통상마찰 문제에 통역으로 참여한 것 자체가, 외교관으로 활동하던 아버지의 백도 있었겠지만, 본인이 여러 가지 방면에서 유능하지 않으면 이런 게 불가능했다) 이런 마사코 황후의 경력을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그 때문에 아이코 공주의 태도는 오래 전부터 황실 관계자로부터 좋은 평판을 들었다. 후미히토와 결탁한 주간지들이 황태자 일가의 성품을 가지고 온갖 시비를 걸어대자, 황족의 풍모를 갖추게 해서 시비를 피하려고 한 것. 그러한 것은 효과를 발휘하여, [[마코 공주]]의 결혼 문제 이후 일본 국민들이 황태자 일가에 대한 호감을 가지게 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여기까지만 보면 아이코 공주 본인은 정치에는 아무 생각이 없고 단지 집안 어른들의 싸움으로만 보일 수 있으나, 철들기도 전 어릴 적 이야기라면 모를까 분별을 갖출 정도로 자란 후로는 아이코 공주 자신도 야심이 없는 사람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일화가 있다. 중학생 때 <나는 의사 아이코>라고 해서 "섬에서 동물들을 성심성의껏 보살폈는데[* 아이코 공주는 어머니가 [[아카사카 어소]]로 데리고 온 유기견/유기묘를 상당히 좋아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경계하던 동물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나에게 다가왔다"는 글을 쓴 적이 있고, 오래 전부터 황태자 내외가 언론들에 뿌린 소문대로 [[도쿄대학]]에 가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고[* 본래 아이코 공주의 성적은 편차치 72점으로 상위 1%였는데, 이때는 [[츠쿠바대학]], [[히토츠바시대학]], [[조치대학]], [[국제기독교대학]]을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도쿄대만큼은 아니지만 명문으로 꼽히는 학교들이다. 그러다가 고2 말에는 상위 0.1%이자 [[도쿄대학]] 안정권인 80점 전후로 올렸다고 한다.], 두 사촌 언니 [[마코 공주]]와 [[카코 공주]]의 결혼 논란이 벌어진 이후 자신도 공무에 진심으로 신경을 쓰는 움직임 등은, 단순히 부모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아버지로부터 [[천황]] 자리를 이을 의지가 확실하게 있다는 뜻이다. 거기에 [[가쿠슈인]] 여자고등과에 진학한 이후에는 종종 해외 귀빈들과의 자리에 참석해서 대화했고, [[영국]] [[이튼 스쿨]] 단기유학 당시 현지 학생들과 일본인 학생들 사이에서 연결 역할을 맡고, 친하게 지내는 사촌언니 [[마코 공주]]로부터 공무에 대해 배우곤 한다. 그리고 부모가 천황/황후가 된 이후에는 외국 왕실 축하사절들과 대화를 나누는 자리에도 참석한 것이 확인되었다. 또한, [[히사히토]]와는 의외로 사이가 좋다고 한다. 히사히토도 황실의 후계자라는 이유만으로 키코비와 후미히토의 야욕으로 인한 압박감과 스트레스가 많았으나 그럴 때마다 아이코 공주와 놀면서 스트레스가 풀리고 정서적으로 안정이 되었다고 한다. 이렇듯 성격이 안 좋다고 해도 히사히토가 아이코 공주만은 잘 따른다고 한다. 즉 히사히토는 자신을 억압하고 구속하는 사람들에게 거칠게 대하지만 아이코 공주처럼 자신을 배려하고 다정하게 대해주면 잘 따른다는 것이다. 그 말은 히사히토도 여타 다른 또래아이들과 같이 평범한 소년으로 살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환경이 발목을 잡았고 아이코 공주마저 없었으면 히사히토도 어떻게 삐뚤어졌을지 모른다. 그리고 현재로서는 히사히토가 부모인 키코 비와 후미히토의 바람과는 달리 황위를 포기할 수도 있다. 이유는 앞서 말했듯이 부모보다 아이코 공주를 더 좋아하고 따르기에 부모가 원하는 걸 하지 않을 수 있고 히사히토도 황위에 큰 관심이 없어보인다. [[나루히토]]는 자식이 아이코 공주 하나밖에 없고, [[후미히토]] 집안에 황위를 넘기지 않기 위해서는 아이코 공주에게 후사를 물려주는 수밖에 없기 때문에 자신의 부모가 그랬던 것처럼 빡빡하게 키우지 않았을 뿐이지 아이코 공주에게도 제왕학을 가르쳤을 것이다. 아이코 공주 본인도 태어난 순간부터 상황이 호전되기 전까지 10여 년 동안 주변으로부터 수많은 음해와 방해공작 등에 시달리면서, 스스로의 몸을 지키기 위해 자연스럽게 황위를 목표로 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보면 오래 전부터 여러 가지로 논란이 많고 현 일본 황실에 존재하는 유일한 남자아이인 [[히사히토]]가 있어 후계자로 고려 자체가 되지 않았던 [[마코 공주]], [[카코 공주]]와 친하지만 사촌동생인 히사히토와 소원한 사이라는 것도 단순히 주변 분위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소리가 된다. 이는 마코 공주의 결혼 논란이 한창 일어나는 와중에 아이코 공주는 그 전까지도 친하게 지내던 마코 공주와 별다른 문제 없이 친하게 지내는 것과 대비되는 모습이다. 현재 일본 국민들의 여론과 선례를 고려했을 때, 후계자 쟁탈전에서 아이코 공주가 사촌남동생인 히사히토를 이길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하지만 여론조사를 보면 아이코 공주가 여성 천황, 즉 천황가 남성의 딸 자격으로 즉위하는 것은 호의적인 답변이 80%가 넘을 만큼 안정적이지만 여계 천황, 즉 천황가 여성의 자식이 즉위하는 문제는 긍정적인 의견이 60%대 정도다. 높긴 하지만 확고한 수준은 아니다. 따라서 나루히토와 후미히토의 싸움은 본인들의 1라운드, 아이코 공주와 히사히토의 2라운드를 거쳐 아이코 공주의 자손과 히사히토의 자손 간의 3라운드까지 가서야 확실히 결판이 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나루히토]]의 성격상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무작정 아이코 공주를 황위 계승 서열에 넣을 리가 없기에, 어떤 방식으로든 아이코 공주의 자손에 대한 황위 계승 문제를 해결해서 히사히토의 천황 승계를 막을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도 있다. [[황실전범]]의 개정을 논의하기 1주일 전, 작은아버지 [[후미히토]] 친왕과 작은어머니 [[키코 비]] 부부가 셋째 [[임신]]을 발표했다. 그리고 [[2006년]] [[9월 6일]], 기적적으로 사촌 남동생 '''[[히사히토]] 친왕'''이 태어나면서 [[일본 황실]]에 드디어 [[남자]] 후손이 생겼다. 사실 [[일본]]에서는 "기적이 아니라 현대 과학의 힘을 빌려 [[수정란]]을 선별해 낳았다"는 게 거의 기정사실화되어 있다. 사실 [[키코 비]]가 [[산부인과]]를 전전한 것이 그것 때문이란 소문도, [[낙태]]설&[[후미히토]] 친왕의 문란한 여성 관계로 인한 부인과 질환 못지않게 많이 도는 소문이다. 그래도 여전히 남성 황족의 수는 적어서, 만약을 위한 '여성 황족의 결혼 후 신분 유지'와 관련된 법이 2012년에 논의되었으나, [[노다 요시히코]] 당시 [[일본 내각총리대신|일본 총리]]가 "현행 법을 그대로 유지하겠다"고 발표하면서 흐지부지되었다. 결국 그의 뒤를 이어서 총리가 된 [[아베 신조]] 총리가 취임한 뒤 '황통은 남계로 잇는다'라고 발표하면서 사실상 여성 황족 문제는 현상 유지로 결론이 났다. 2017년 [[아키히토]] 천황이 생전 퇴위를 발표할 당시 "[[나루히토]] 황태자가 즉위하면 [[후미히토]]를 황태자로 대우하겠다."라고 발표되며 나루히토-후미히토-히사히토의 계승으로 정해지며 내친왕으로만 남는 것이 확정되었다. 문제는 훗날 [[히사히토]]의 대가 되면 황실에 남자가 히사히토 하나밖에 없고 동세대 황족 여자들은 다 결혼으로 황실을 떠난 뒤가 된다는 것이다. 남는 자로는 평생 [[독신]]으로 남아 황실을 뒷받침하겠다고 선언한 [[아키코 공주]]가 있다. 자세한 것은 히사히토 항목 참고. 한편 일본 여론은 "여성 황족의 천황 즉위를 용인해야 한다"는 여론이 [[http://www.hankookilbo.com/News/Read/201901061739054318?did=NA&dtype=&dtypecode=|80% 이상으로 압도적이다.]] [[2019년]] [[5월 1일]] [[나루히토]] 천황의 즉위 이후, [[궁내청]]에서는 과거 기록들을 뒤적거리면서 과거 여성 천황이 있을 때 각종 제례 행사시 여성 천황이 어떻게 했는지에 대한 조사를 비밀리에 시작했다. 사실상 궁내청은 나루히토 천황이 향후 아이코 공주의 천황 등극을 요구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움직이는 듯하다. 거기에 일본 내각에서도 과거 [[고이즈미 준이치로|고이즈미]] 정부 및 [[노다 요시히코|노다]] 정권 때 여성 미야케, 여성 천황에 대한 조사를 해두었고, 그 결과에 따라서 법률 개정안을 작성했는데 의회에 제출되도 문제가 없을 정도로 상당히 진척되었다. 그러나 [[히사히토]]의 탄생 및 [[아베 신조]] 총리로 대표되는 여당 내 우익 세력들의 강한 반발 등으로 인해 유야무야되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정권 시절 관방장관 직책이던 [[아베 신조]]가 이러한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법제화하는 걸 강하게 반발했었다고 한다. 이후 아베 총리는 노다 총리의 후임이 되자마자, 노다 총리 임기 중에 하던 여성 미야케 관련 조사를 중단한다. 생전퇴위 특례법 제정 당시 일본 내각은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황실의 안정적인 승계를 해결하기 위한 조사 결과를 국회에 보고하라"는 조항이 있는데 그걸 수 년 이상 무시하고 있으며, 2019년 국회에서 이를 지적하고 빨리 조사하라고 독촉하고도 2019년 6월 기준으로 조사조차도 안 하고 있다. 이런 것을 감안한다면 [[나루히토]] 천황이 결심만 하고 아베 총리가 더 이상 실권을 쥐지 못하는 시점[* 아베는 총리 사임 이후에도 사실상 실권을 유지하고 있다가 2022년 암살되었다. ]이 된다면 아키히토 상황의 생전퇴위 때보다 더 빠르게 여성 천황 및 여성 미야케에 대한 일이 진척될 것으로 보인다. 아이코 공주가 성인이 되며, 현재 황위 계승 서열 2위인 [[히사히토]]가 고교 진학 시즌에 돌입하며, 무엇보다 [[마코 공주]]의 결혼 연기 기한이며 [[나루히토]] 천황도 즉위 의식과 [[2020 도쿄 올림픽]]을 끝내고 한숨을 쉴 수 있는 시기가 레이와 3년인 2021년에 모조리 겹친다. 일본 언론들은 2021년을 "여성 천황 및 여성 미야케 제도의 향방을 가를 가장 중요한 시기"로 평가했다. 그리고 2019년 5월 이후 추가보도에 의하면 [[아키히토]] 상황과 [[미치코 상황후]]도 여성 천황 용인에 대한 인식이 부정적에서 긍정적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더욱더 아이코 공주가 [[히사히토]]를 제치고 천황 자리를 물려받을 가능성이 커지게 되었다. [[후미히토]]와 [[키코 비]]는 권력을 갖기 위해 욕심을 부린 끝에 무리하게 [[히사히토]]를 낳았지만, 결국 이로 인해 13년 전 잠잠해졌던 여성 천황 논의는 또 크게 일어나고 있다. 자신들의 과오가 슬하의 3남매의 앞길을 막아버렸고, 본인들의 앞길도 막혀버리고 말았다. [[2020년]] [[10월]], 아버지 [[나루히토]]가 차기 후계자를 왕세제 작은아버지 [[후미히토]]로 공식 선언하는 '릿코시' 의식을 [[11월 8일]]에 치르기로 했다고 밝혔다.[[http://naver.me/FN2c63pn|#]] 본래 4월에 치르려했으나 [[코로나바이러스-19]]의 범유행으로 미뤘다. 11월 8일 작은아버지 [[후미히토]]의 황태제 등극을 알리는 릿코시 선포식(立皇嗣宣明の儀)을 치렀다. [[https://www3.nhk.or.jp/news/html/20201108/k10012700871000.html|#1]] [[https://www3.nhk.or.jp/news/html/20201108/k10012701031000.html|#2]] [[https://www.yna.co.kr/view/AKR20201108035100073?input=1179m|#3]] 이로써 일단 공식적으로는 차기 왕위는 아이코보단 후미히토 - 히사히토의 단계가 될 가능성이 커졌으나 여전히 국민 여론은 후미히토로의 황통 계승에 상당히 부정적이며 이는 2020년 11월, [[마코 공주]]의 결혼 강행 선언 및 11월 30일 후미히토의 마코 공주 결혼 허용 선언으로 더욱 강하게 나오고 있다. 실제로 일본 언론들이 유독 이때 이후부터 마코 공주 결혼 찬성 관련 기사들을 마구잡이로 쏟아내고 와이드쇼 진행자들이나 출연진들 대부분이 마코 공주를 옹호하는 이유가 그만큼 국민들의 반응이 안 좋기 때문이다. 거기에다가 '황사'라는 직책 자체가 어디까지나 '잠정 승계서열 1위에 황태자에 준하는 대우를 받는 존재'이고, 생전퇴위 관련 특례법 등에도 없는 지위이다. 시간이 갈수록 후미히토 일가에 대한 정치권의 태도도 심상치 않아, 후미히토의 지위는 '릿코시 선포식' 이후로도 불안정하다. 후미히토는 이를 해소하기 위함인지 황실의 중요한 제사를 마치자마자 가족과 함께 정치인 장례식에 참여하는 등 [[아베 신조]]/[[스가 요시히데]] 정권에 지나치게 친화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이런 행동은 일본 국민들의 감정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일본 정부]]는 "하가(下嫁)[* 신분이 높은 여자가, 자신보다 낮은 신분의 남자에게 시집감.]한 여성 황족(내친왕 한정)에게 '코죠(皇女)'라는 이름의 특별 국가직 공무원 자격을 부여하고, 하가 후에도 황실의 공무를 맡기겠다"는 방안을 들고 나왔다. 하필 타이밍이 [[마코 공주]]가 "[[코무로 케이]]와의 결혼을 강행하겠다"고 주장하는 문서[* "국민들이 반대하는 것은 알지만, 나는 그것을 다 무시하고 [[코무로 케이]]와 결혼할 거고, 국민들이 결혼을 반대하면 난 죽을 거다"라고 겁박한 것이나 다름없는 직설적인 내용이었다.]를 공표하고, 코무로 문제의 근원인 부채 문제를 제기한 장본인의 채무독촉 포기선언까지 일어난 직후였다. 때문에 '코죠' 제도는 사실상 [[마코 공주]]를 위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이에 대한 반발이 무시할 수준을 넘어서니 그동안 잠자코 있던 야당들이 들고 일어서고 여당의 전직 중의원 의장마저도 이 제도에 부정적인 인식을 표출했다. 그래서 황실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들은 아직도 후미히토 친왕이 입황사의 의식을 치루었음에도 여전히 후미히토가 덴노가 되지 못할 가능성은 제법 크다고 판단하고 있으며, 이는 후미히토에 우호적인 태도를 가진 극우들조차도 가지고 있는 생각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